오후에 센터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대표님과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수업을 했던 학생 분들의 안부를 여쭙고,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거나 더 나빠진 상황을 들었다. 이제 나는 한국어 교사가 아니라 다른 역할을 하게 되리라. 선생님이라고 불리었지만 언제나 내가 더 많이 배웠다. 

저를 많이 이용하시라 몇 번이나 당부하고 센터를 나섰다. 이미 해가 한참 기울어 있었다.배움에 어디 끝이 있겠냐마는, '배우는 중'이라는 변명에는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끝에 가까운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이 자신의 삶으로 가르쳐 준 것들에 책임을 지자고, 이 만남들에 책임을 지자고, 현실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삼월인데도 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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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종강식 날이었다. 이번 학기 수업 사진을 모아 만든 동영상을 본 다음 돌아가며 소감을 발표했다. 기념 사진을 찍고 학생 분들께 수료증을 드렸다. 이번 학기 들어 함께하는 수업이 없어 뵙지 못했던 S씨와 두 딸, H씨를 오랜만에 만나 기뻤다. S씨는 외부 활동을 활발히 하시고 있어 보기 좋았다.


계절학기 수업 때문에 센터에 못 나간 사이 캄보디아에서 오신 W씨가 나를 그려 주셨더라. 화이트보드에 붙여 놓은 작품을 보고 무척 기뻤다. W씨는 뜨개질도 잘 하신다. 벌써 멋진 무늬가 들어간 목도리를 하나 완성하셨다.

종강식이 끝난 다음에는 대표님, 다른 선생님, 학생 분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다함께 어울려 뜨개질을 했다. 뜨개질 열등생이라 무늬 넣기는 포기하고 겉뜨기로만 넥워머를 만들 생각인데, 이것도 한 번 방향을 바꿀 때마다 헷갈려서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학생 분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참 재미있다.

밤에는 에너지가 바닥나 힘없이 누워 있었다. 늦게 귀가한 동진님이 내 꼴을 보고 급히 새우덮밥을 만들어 주었다. 정말 맛있었다. 회사 일 때문에 날마다 야근 하느라 힘든 동진님에게 나까지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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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센터 크리스마스 파티에 갔다. 필리핀 분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많이 하고 싶어하셔서, 올해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어제 음악시간에 한국어 캐롤을 공부하고 트리를 장식했다.

오늘은 뜨개질을 하며(열풍!) 모두 모이기를 기다린 다음, 핸드벨을 흔들며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징글벨'을 불렀다. 그리고 한 가지씩 준비해 온 선물을 사다리타기로 나누었다.


나도 J씨와 E씨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몇 주 전에 E씨가 J씨와 시장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 선물을 사러 갔는데 좋은 물건이 무척 많았지만 모두 너무 비싸서 핸드크림밖에 못 샀다는 일기를 써 왔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역시나 핸드크림과 작은 화장품들이었다. 소중하게 써야지.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나눈 다음에는 쪽지에 2011년 소원을 썼다. 모두들 모국어로 여러 장 빽빽하게 쓰더라. 딸이 둘 있지만 아직 국적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JE씨에게 대표님이 "JE씨 소원 국적?" 했더니 국적이 아니라 아들이 갖고 싶다고 하더라. 소원 쪽지를 모아 소원주머니에 넣은 다음, 학생 분들이 집에서 만들어 온 필리핀 잡채, 돼지고기 요리, 과일가게 하는 W씨가 가져온 커다란 바나나, 빵, 각종 음료수, 비코, 대표님이 만드신 김치전 등을 잔뜩 먹었다. 나는 어제밤에 쿠키를 구워 가져갔다.


장애인인 남편이 수술을 하고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그만두었던 S씨가 시간을 내어 잠시 들렀다. 휴대폰 공장에서 일주일에 엿새를 일한다고 한다.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단어를 모두 받아 써 캄보디아어-한국어 사전을 찾아본 다음 센터에 와서 물어볼 정도로 공부에 열심이었고, 이번에 드디어 한국어 능시도 합격했었는데. 하지만 이제 돈 벌어야 하니까 고향에 못 가지만, 다음에 고향에 갈 때는 돈 많이 벌어서 갈 거란다. 잠깐 와서 인사 하고 식사 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며 쿠키를 코에 몇 번이나 다시 대어 보며 가셨다. 작년부터 나와 수학, 한국어, 음악을 공부했지만 이번학기에는 센터에 오는 시각이 달라 줄곧 만나지 못했던 G씨도 두 딸을 데리고 오셔서 오랜만에 뵈었다.



날씨가 무척 추웠다. 집에 와서는 동진님이 끓여준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쉬었다. 저녁에는 피자를 먹고 스파클링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슬슬 기말 보고서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 할까 하고 주섬주섬 일정표를 봤더니, 화요일 오전인 줄 알았던 제출마감일이 월요일 오전이었다. 기겁해서 논문  한 편을 얼른 사이버 강의실에 제출하고, 나머지 논문을 조금 쓰다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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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센터에서 올해 마지막 수업을 했다. 그리고 점심으로 WI씨가 만들어 온 캄보디아 요리(라면잡채?)와 J씨가 만들어 온 필리핀 음식 비코(Viko)를 먹었다. 비코는 우리나라 약식과 비슷한데 코코넛을 넣어 훨씬 단맛이 났다.



그리고 곧장 홍대 앞 [카카오봄]에 가서 예약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받아 왔다. 달콤한 오렌지향 케이크였다. 그런 다음 장을 보고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온갖 레서피와 요리팁을 참고한 덕분에 대성공! 정말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요리해 무척 기뻤다. 그만큼 손이 가긴 했지만 이만한 맛이라면 또 해 먹을 만 하겠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한국 SF 컨벤션]에서 동진님과 처음 만난지 오늘로 3416일. 그래서 큰 초 하나 당 천 일, 작은 초 하나 당 백 일, 제일 작은 초 하나로 열엿새 해서 이렇게 초를 가득 꽂아 함께 후 분 다음 스파클링 와인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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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센터에서 올해 마지막 수업을 했다. 그리고 점심으로 WI씨가 만들어 온 캄보디아 요리(라면잡채?)와 J씨가 만들어 온 필리핀 음식 비코(Viko)를 먹었다. 비코는 우리나라 약식과 비슷한데 코코넛을 넣어 훨씬 단맛이 났다.



그리고 곧장 홍대 앞 [카카오봄]에 가서 예약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받아 왔다. 달콤한 오렌지향 케이크였다. 그런 다음 장을 보고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온갖 레서피와 요리팁을 참고한 덕분에 대성공! 정말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요리해 무척 기뻤다. 그만큼 손이 가긴 했지만 이만한 맛이라면 또 해 먹을 만 하겠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한국 SF 컨벤션]에서 동진님과 처음 만난지 오늘로 3416일. 그래서 큰 초 하나 당 천 일, 작은 초 하나 당 백 일, 제일 작은 초 하나로 열엿새 해서 이렇게 초를 가득 꽂아 함께 후 분 다음 스파클링 와인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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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에서 뜨개질 수업이 열려서 나도 갔다. 학생 분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뜨개질을 했다. 점심으로는 J씨가 만들어 온 필리핀 잡채와 파인애플 주스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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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내내 몸이 좋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시험기간이고, 11월에 거의 매주 발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앓아눕게 될까봐 신경을 많이 썼다.

센터에서는 간이귀화 자격이 되는 A씨가 F2비자를 연장하러 출입국관리소에 다녀온 얘기를 써 왔다. A씨는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해도 비교적 관계가 원만하고, 남편에게 직장도 있다. 그래서 수업 후에 대표님께 뭔가 사정이 있는지 살짝 여쭈어 보았더니, 현재 한국에서는 한국인 자녀가 없는 이주여성에게는 실무상 국적을 잘 주지 않는다고 한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애를 낳으란 말이다. 영주권이라도 받으면 좋겠지만 많은 남편들이 영주권 발급에 협조하지 않고 귀찮아한다. 물론 저소득층에서 결혼이주가 많다 보니 재정증명 문제가 걸리는 경우도 있다.

아이가 조금 자라고 한국어도 늘어 여유가 생긴 S씨는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듣거나 주위에서 본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아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 문장으로 열심히 만들어 와서 시간이 날 때마다 대표님께 많이 여쭈어 본다. 모어-한국어 사전이 부실하고 S씨가 아는 어휘만 사용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긴박하다'는 단어를 찾아 왔는데 '급하다'와 '긴박하다'의 뉘앙스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옆에서 보며 참 난감했다. 그런데 대표님이 제시하신 설명.

"남편이 화 났어요. 욕해요. 소리 쳐요. 이거 긴박하지 않아요. 남편이 화 너무 났어요. 칼로 찌르려고 해요. 이거 긴박해요."

그래, 바로 그런 상황이 '긴박'하지. 다른 풀이에 '급하다'와의 차이를 모르겠다며 아리송해하던 S씨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와서는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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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3일 금요일

일상 2010.09.03 23:00 |
이번 학기에는 오전반을 가르친다. 오전반 학생은 한국에 온지 일이 년 남짓인 분들이시다. 지난학기에 한글을 배우고 이제 국어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수업이나 식사시간에 뵌 분들이라 초면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부당한 상황에 항의하고, 부당하지 않은 상황을 오해하지 않기 위한 기본이다. 그러니까 한국어 수업을 꼭 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때로 학생 분들은 수업에 오지 않는다. 그리고 빤한 핑계를 댄다.

어떤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수업에 온다. 수첩에 일기 한두 줄 써오는 숙제를 꼭 한다. 조금이라도 한국어를 외우려고 애를 쓴다. 친구를 기다려 데리고 온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은 의지를 갖고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며 늘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하루를 살지는 않는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원래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겠다고 말만 하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거짓말에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거나 자신의 고통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도 있다. 가끔 호의와 노력은 배신당하고 진심을 담았던 약속은 머쓱한 웃음으로 덮인다.

어떤 이는 없는 형편에 수십 만원을 국제전화 하느라 쓴다.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거나 여러가지 할인 혜택을 활용하면 저렴하게 전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모국에서 집의 경제력을 가늠하며 살림을 해 보거나 자급자족 수준 이상의 여유를 경험한 적이 없고 한국에 와서도 모국과 다른 경제규모를 이해하고 학습할 기회를 얻지 못한 어린 이들은 때로 소비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다. 그래도 이 나라는 부자잖아. 다들 휴대폰 쓰잖아. 어떤 이는 거짓말을 한다. 센터에는 병원에 간다 하고 집에는 센터에 간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가족, 작은 거짓말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고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정체불명인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사라진다. 노동자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산재보험도 최저임금도 무시한 노동으로 쥐는 일당 몇 만원. 그 돈이 없으면 굶어 죽을 지경이라서가 아니다. 자기 힘으로 번 삼만 원이 있으면 남편이나 시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장에서 옷을 여섯 벌은 살 수 있다. 국제전화로 엄마 목소리도 들어보고, 안 쓰고 잘 모으면 친정에 보낼 수도 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갖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여성들. 일상에서 무시당하는 그들의 욕구는 때로는 자기 몸과 마음의 병이 되고 때로는 가까운 이들을 베는 칼이 된다.

그렇지만 원래 이런 일이다. 이것은 이주나 여성이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나 활동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도 내가  한 번 더 기합을 넣고 다시 손을 내밀어 보겠다는 각오의 사이사이에 있는, 타인에 대한 기대가 패어 놓는 깊은 틈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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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일 금요일

일상 2010.07.02 12:30 |
오전에 시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고, 센터에 다녀왔다. 센터에서는 E씨가 필리핀에서 가져온 말린 망고를 먹었다. 필리핀 노래도 배웠다. 베트남에서 얼마 전에 오셨다는 P씨와 처음 만났다. 오늘 수업은 민속놀이에 관한 것이라 아주 재미있었다. 중국에서도 공기놀이를 한다. 한국과 달리 공기는 4개이고, 양의 무릎뼈를 (앞뒤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붉은 색으로 염색해서 쓴다고 한다. 양의 무릎뼈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인 것 같다.

오후에는 비가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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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이 종강한 덕분에 오늘은 오전부터 센터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난 주에 기말고사로 자리를 비운 사이 캄보디아에서 WI씨가 새로 왔다. 아직 한국에 온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아가씨이다. 캄보디아 정부에서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3월부터 4월 말까지 일시중단했었는데, 중단이 풀리자마자 수속을 밟고 온 것 같다.

결혼중개업을 통한 국제결혼은 캄보디아 국내법상 전면 금지된 불법행위이고(인신매매와 노동착취에 대한 국제기구의 권고를 따른 입법이다), 캄보디아 국제결혼의 약 80%는 결혼중개업자를 통한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프랑스 식민지 시대나 75년 대학살 전후에 해외로 이주한 캄보디아인 2, 3세와의 결혼이니 거칠게 요약하면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인과의 결혼을 막는 것 = 불법결혼을 막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당연하게 합법인 결혼중개업자를 통한 국제결혼은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불법이고, 필리핀의 우편주문신부금지법, 인신매매방지법과 UN 의정서에도 반할 가능성이 있다. 상업적 국제결혼중개는 미국에서도 불법은 아니지만 국제결혼브로커규제법과 인신매매방지법에 역시 걸린다. 우리나라는 UN의 인신매매 예방,억제, 처벌에 관한 의정서(팔레르모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WI씨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대표님이 기역니은부터 따로 시간을 내어 가르치고 계신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캄보디아 출신인 S씨가 듣는 수업에 같이 들어오고 있다.

태국의 탁신 전 총리와 붉은 셔츠단 건으로, 원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모양이다. 캄보디아와 태국은 앙코르와트를 두고도 분쟁중이라고 한다. 고향에 어머니, 언니, 오빠가 남아 있는 S씨가 걱정이 많다. 태국에서 온 E씨에게 "언니, 태국에 왜 빨간 옷 노란 옷 있어요?" 하고 묻는다. "우리 다 결혼해서 한국 왔으니까, 캄보디아, 태국, 상관 없어요." 한다. E씨도 태국에 가족이 있지만, 붉은 셔츠의 영향력이 약한 남부 지방 출신이라서인지 S씨처럼 걱정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지도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분 어디쯤을 가리키며 "이 밑으로 빨간 옷 못 와요. 전 대통령 나쁜 사람이에요. 돈 많아요. 사람들이 다 싫어해요. 우리 고향에는 절대 못 와요." 하고 설명을 한다. S씨는 센터를 나가면서도 "언니, 우리는 싸우지 말아요, 친하게 지내요." 하고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또 많은 일이 있었다. 기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 기억해야 하지만 차마 기록할 수 없는 일들.

나는 오늘 E씨가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들었다. 남편의 장애 때문이리라고 지레짐작 하고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끔찍한 이야기였다. E씨는 아직도 눈 수술을 하지 못했다. 안과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나 외국인이에요. 돈 없어요. 나 건너가요. 내 뒤에 온 사람들 먼저 들어가요. 세 사람, 세 사람 건너갔어요. 간호사한테 왜 나 건너가요? 물었더니 지금 들어가래요. 의사가 안 봐줘요. 한 달 뒤에 다시 오래요. 나 안 보여요. 눈 계속 가려워요. 이제 수술 해야 해요. 한 달 못 기다려요. 다른 병원 찾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오늘 국어 수업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병수발을 드는 사이에 잃은 청소일자리 대신 다른 일거리를 찾으러 갔다.

지난 2주 동안 J씨가 왜 아무 연락도 없이 센터에 오지 못했는지도 들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빼앗긴 휴대폰 대신에 부모에게 눌려 사는 남편이 몰래 개통해 준 새 휴대폰을 가지고 왔고, 드디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머리를 염색하고 예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싸구려이지만 큐빅이 잔뜩 박힌 화려한 가방을 들었다. 그녀는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며 나도 못 참아요, 나도 이만큼 쌓였어요, 나 더 예쁘게 할 거예요, 안 예쁘면 일도 못 구해요, 돈 못 벌어요, 하고 언성을 높이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주민번호가 제대로 찍힌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민증을 돌려보며 그녀를 축하했고, 오늘 옷차림이 참 예쁘다고, 아기 엄마가 아니라 아가씨 같다고 했다.

사회복지학과 학부 시절, '왜'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우리는 여러가지 주어진 상황에서 '왜(why question)'가 아니라 '어떻게(How question)' 라고 묻는 연습을 계속했다. 가끔은 교수님도 한참 설명 중에 실수로 무심코 "왜"라고 물으실 때가 있었고, 그러면 우리는 웃었다. 나는 '어떻게 질문'을 대화 기술의 일종으로 생각했었다. 적절한 맞장구나 눈맞춤처럼, 더 원만하고 열린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몸에 잘 익혀 두면 좋은 요령처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절대로 '왜'냐는 질문을 던지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것은 대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에는 타인이 결코 왜라고 물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센터에서 일한 지 일 년이 지났다. 전국 한 자리 등수인 모의고사 성적표에 의기양양해 하며 대입을 통과하고, 뭐가 어땠든 가치로운 일을 하겠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날로부터는 십 년이 지났다. 그 사이를 채우는 폐에 가까웠던 봉사활동들과 기억에서 쉽게 사라진 실패한 시도들. 그리고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돌이켜 보면 형편없는 사회복지학도였던 내 옆을 흘러간 수많은 책과 말들을 지나, 공정함과 정의와 복지와 책임에 대한 거대담론을 넘어, 삶에는 이유가 무의미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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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자혜와 이야기하면서 생각한 것이 있어 대표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좋은 정보와 참고 자료를 많이 주셨다.

센터에서는 E씨가 남편의 건강 때문에 지난 주부터 오지 않고 있다. 꽤 심각해서 큰 병원에서 수술을 했던데, 생계는 어떻게 하고 있을지 걱정이다. E씨도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또 지방선거에서는 영주권자도 투표할 수 있다고 들었으나 센터에 오시는 영주권자 분들 중에 선거공보물을 받은 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복지관에서 일자리를 구했던 S씨가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채용 취소를 당했다. 대표님이 누가 취소시켰냐고, 부당한 일이니 제대로 따져야 한다고 S씨에게 당부하셨다. 그러나 S씨가 아직 채용을 취소한 담당자 이름을 알아 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모 사회복지기관에서 모국을 방문한지 3년 이상 된 결혼이주여성의 모국여행경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남편이나 시부모님 중 1인이 동반해야 한다) 이 기회에 태국에 갈 수 있게 되어 그쪽에 마음이 쏠린 탓인 듯 하다. 역시 고향에 다녀온지 3년이 넘은 G씨는 이 프로그램에 신청하지 않았다. 비행기 표를 줘도 가서 쓸 자기 돈이 조금은 있어야 할 텐데 그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5월 말 출산예정이던 J씨는 예쁜 딸을 낳았다. 임신 중에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심했고 어린 나이에 초산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진통 4시간 만에 무사히 낳았다고 한다. 사진 속 아기는 무척 귀여웠다. 성격도 순하단다. J씨는 작년에 한국에 왔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열여덟 갓 넘은 J씨를 스물두 살인 줄 알고 데려왔었다. 한국까지 와서 외국인등록을 하러 가서야 J씨가 쓴 생년을 보고 생각보다 훨씬 어린애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혼을 해서 한국에 데려오는 과정이 얼마나 허술했고, 그 사이에 얼마나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안 했으면 나이도 몰랐을까 싶어 기가 막혔다.

오늘은 책상을 정리하다가 센터에 들어올 때 Z씨가 영어로 또박또박 쓴 자기소개서를 얼핏 보았다. Z씨는 내 예상보다 어렸다. 좌상단에는 아마 교복인 듯한 옷을 입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좋아하는 과목은 순수수학 및 응용수학, 이유는 잘 했기 때문에(I was very clever in it), 존경하는 인물은 과학발전에 큰 기여를 한 알버트 아인슈타인, 장래희망은 기술자였다. Z씨는 한국에 와서 한국식 이름을 가진 아이를 둘 낳았다. 일주일에 한 번, 초등학교 2학년 수학을 한국어로 배운다.

지난달 말에 두레생협에 가입했는데 홈파티 때 음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아직 한 번도 주문을 못 해 봤다. 하지만 페브리즈, 바디워시 등 생필품이 떨어져 홈플러스에서 샀다. 대형마트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공산품과 탄산수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결국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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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7일 금요일

일상 2010.05.07 23:30 |
센터 한국어 수업이 휴강되고 컴퓨터 수업을 한 날이었다. 아기를 보고 회의를 했다.

저녁에는 상수역에서 전션과 만났다. 점심을 너무 늦게 먹어서 어떻게 할까 했는데, 전션도 그다지 밥 생각이 없다고 해서, 타르트집 [아벡누]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지도 상 위치가 잘못되어 꽤 헤맸다. 간신히 찾아 들어가고 나니 배가 고파져, 나는 모시조개 끼쉬, 전션은 현미밥을 먹었다. 타르트는 민트쇼콜라 타르트와 딸기 타르트. 민트쇼콜라 타르트도 아주 맛있었다. 여기 타르트 정말 맛있다......모든 메뉴를 먹어 볼 기세야.

전션과의 만남은 늘 즐겁다. 고등학생 때부터의 사귐이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져 온 것도 신기하고, 서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친구로 좋아하고 기댈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하다 보니 어느새 열 시가 다 되어,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낮에는 더웠는데 밤이 되니 무척 춥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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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apt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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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버지 생신이다.

오전 8시 20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생신 축하 문자를 보냈는데, 그 뒤로 뭘 했는지 기억이 없다. 눈을 번쩍 뜨니 침대 옆에 놓아 두었던 휴대폰이 "열한 시" 하고 짹짹 운다. 아니, 내가 진행하는 수업이 오전 열한 시 부터인데! 벌떡 일어나 대표님께 다급히 전화를 했다. 방금 일어났다고 하니 대표님이 "어이구~잘 했어요~ㅋㅋㅋ 음악 수업부터 하고 있을 테니 와요~"하고 웃으신다.

게다가 오늘은 오전 9시부터 수강신청을 하는 날이었다. 설마 마감될까 생각했지만 막 잠에서 깼을 때는 순간 불안했는데, 역시나 내가 신청하려고 생각했던 과목들은 하나도 정원이 차지 않았더라. 올해 내내 아침에 일어나느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한 터라 오후 수업만 넣었다. 오후 수업만으로 시간표를 짤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 변호사자격시험 필수과목을 포기한 결과지만, 이렇든 저렇든 오전 수업은 질색이다. 밤 열한 시까지 수업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아침에는 못 움직이겠다. 신념이 아니라 게으름을 동력으로 걸어온 프리랜서의 길, 아아, 훈늉하구나.

아리랑 TV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하는데, 순안 씨가 서류심사에 통과해서 일요일에 예심을 본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다함께 김밥을 까먹고 순안 씨 노래 연습을 했다. 늦잠 잔 주제에 배는 고파서 김밥과 귤을 맹렬히 먹었더니 나중에는 너무 배가 불렀다. 태국에서는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남은 하나를 누가 먹으면, 그 사람에게 친구들이 "그래, 네 남편 잘생겼다/멋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 남는 거 제가 다 먹어야겠네요'라고 말할 뻔 했다. 

친정 가족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청소를 한 다음, 청소따위 하지 않은 양 쿨하게 앉아 웹질을 하다가 아버지, 어머니, 아우님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오, 화장실 청소 했네."라고 하셔서 쿨에서 큐트로 컨셉을 바꾸어 으쓱으쓱 춤을 추었다.

아버지 차를 타고 함께 [북해도]에 갔다. 퇴근 길에 바로 간 동진님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맛있고 즐겁게 저녁식사를 한 다음 집에 돌아와 아우님이 준비한 케이크로 생일 축하를 하고 동진님표 커피를 마셨다. 늘 멋진 케이크 테마를 짚어내는 아우님에게 케이크 상자를 열며 "오늘 테마는 뭐야?"라고 했더니 "응.  생신 축하."라고 했는데, 꺼내 보니 과연, 정진정명 생신 축하였다.

친정 가족들은 생일이 겨울에 몰려 있어, 오늘 아버지 생신이 결혼하고 맞는 첫 가족 생일이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축하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했다. 오늘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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